6광탈을 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

오만의 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

6광탈을 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
Photo by Lison Zhao / Unsplash

2024년이 저물고 있다. 그리고 2025학년도 수시도 얼추 마무리되는 추세이다. 이번 주를 기해 수시모집은 충원모집도 마무리되고 정시로의 이월 인원이 정해질 것이다. 오늘은, 올해 입시에 대한 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2024년 9월 4일, 나는 평가원이 주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를 치뤘다. 결과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아주 높은 등급(탐구는 빼고). 거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의 결과. 탐구와 국어를 제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이 성적은 가히 "이상"하다. 난 고등학교 3년을 다니면서 내내 수학 1등급을 찍어본 적이 없다. 만년 2~3등급 따위가 감히 수학 1등급을 맞아온 것이다. '성적이 오른거 아니냐?'라고 내게 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적어도 그 당시에 나는 그렇게 믿었다.

수시 지원

9월 모의평가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대학 수시 지원이 시작되었다. 모 컨설팅 회사에서 수시 상담도 받고, 6개의 대학을 모두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상향하여 쓰겠다고 했다. 담임선생님께선 꽤나 모험적인 지원이고, 재수도 고려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하셨다. 하지만 그당시의 난 3년동안 써온 내 학교생활기록부를 어떻게 보면 맹신했고, 그것으로 내 낮을 내신 성적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 감히 판단했다. 그렇게 나는 어떻게 보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시켰다.

오만의 정점, "미응시"

10월 말, 내게 한 대학교에서 수시전형 1차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이 날아온다. 내가 쓴 6개의 대학 중에선 가장 입결이 낮았던 대학이다. 기쁨도 잠시, 역시 오만함이 내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9월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이것보다 훨씬 높은 대학도 쓸 수 있는데.. 내가 수능을 잘 보면 어떡하지?' 하는 오만의 극치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고 참으로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참고로 수시에 한 번 붙어버리면 수능으로는 대학을 갈 수 없다. 아무튼 저 생각을 가지고, 난 그 대학교의 면접고사에 미응시하는 희대의 바보짓을 해버리고 만다. 주변에선 만류하는 분위기였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만으로 쌓여지고 다져진 벽은 하늘을 찌를 듯 싶었다. 그때도 나는 몰랐다. 내가 그 누구보다 안일했다는 것을.

오만의 벽에 금이 가다

11월 14일.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루었다. 결과는 역시 참패. 이때 9월 모의고사의 환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여태 9월 모의고사라는 온실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세뇌했던 것이다. 오만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메우려 하지만 메워지지 않는다. 메워지는게 이상하다. 그것은 애초에 허황된 것이었으니.

오만의 벽이 부서지다

11월 말. 대학교에서 수시 1차합격 발표가 났다. 남은 5개의 대학 중에서 4개는 면접조차도 갈 수가 없었다. 불합격이었으니깐. 그때 내 오만의 벽은 부서졌다.

오만의 벽이 부서지는 것은 내 심적 고통을 동반했다. 부서진 벽의 조각은 내게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대피할 시간조차도 없었다. 여태 쌓여온 업보를 피할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머지 한개의 대학은 면접을 오라는 반가운 소식을 내게 안겨주었다. 오만의 탑이 부서진 나는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내 딴에선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그것만큼은 지금의 내가 봐도 진실인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하는대로 흐르진 않았다. 대답 자체는 충실히 잘 했지만, 내신이 발목을 잡았나보다. 20명이 정원이고, 나는 38등을 하여 예비 번호 18번을 받게 되었다. 1차, 2차를 거쳐 11번이 되었지만 더이상 숫자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수시 6광탈을 하게 되었다.

이제야 보이는 것

참 오만하다. 오만하고 안일했으며, 무모했다. 생각해보면 이 길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나 빼고 다 알았던 것 같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난 내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했고, 다른 의견을 주는 이에게 거의 통보하듯이 내 계획을 전했다. 그들이 의견을 개진할 기회는 주지 않았다. 이게 문제였다. 이게 다 끝나고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배워가는 것

내가 플레이한 어느 게임엔 이런 스토리가 있다. 세계멸망을 예지하고 독단적으로 세계멸망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벌인 일이 되려 세계멸망의 트리거가 된(자기실현적 예언) 내용이었다. 그 누군가는 주변의 만류와 이의는 일체 받지 않았다. 항상 그는 그만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그 "누군가"에게 투영됨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배워가는 점은 있다. 그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스토리를 감상할 때도 "누군가"에 대해 난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 이제 나는 그 감정을 나 자신에게 느낀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절대 이러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마무리하며

이런 두서없는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그래도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은 닿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의 필자와 같은 행동을 했던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돌아보고 고쳐보길 부탁해본다. 두고두고 후회하기 전에 말이다. 내게 있어서 이 이야기는 잃은것도 많았지만, 생각할 거리도 많았고, 배워갈 점도 많았던 이야기였다.

수시에서 합격된 대학이 없고, 수능도 못봐서 재수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이도록 한다.